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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4. 24世 〉17. <부정공>종훈(宗勳)配 유인전주이씨전(孺人全州李氏傳)
1. 문헌 목록 〉24. 24世 〉19. <광양공>의송공휘상훈묘표(義松公諱尚勳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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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광양공>의송공휘상훈행장(義松公諱尚勳行狀)
義松公諱尚勳行狀 趙公尚勳 字晟範 號義松 玉川人也 其鼻祖 麗朝門下侍中 忠獻公諱元吉 後本朝丙子功臣諱儼於公爲十二世 諱自玉贈司僕寺正 諱榮興贈承旨 諱相祿贈弘文館提學 諱東爀筮任都正後除吏曹參判不就 高曾祖考四世也 公之家門 可謂赫葉華胄名門巨族也 公癸亥生 自髫齔孝友至極 敦睦諸族 異凡聰慧 才器凛凛儀貌 人皆稱之 有長者之風也纔過志學 抱靑雲之志 渡日遊學 誠實修學 値乙酉光復 歡喜雀躍歸國 時再光復直後 不國内諸般情勢不安 加之左翼亂動日甚 國土兩斷 更作累卵之危 公以爲國之誠 決然入學陸士 戊子十月 陸士特別七期畢業 任陸軍少尉 當六二五之亂 東馳西驅 其赫赫戰功 可垂靑史也 累進至陸軍中領己亥退役歸鄉 雖在草野 可見愛國愛族之蹟 適有庚子軍事革命 標榜如下曰 共產侵略防止不正腐敗一掃 國土統一完遂 自由民主政治確立 遂軍政實施 公熟考極盡協力 然日未久革命政權 慢於公約履行 而反謀軍政延長之策 故公以見危授命 殺身成人之賦質 不能袖手傍觀 與金東馥大領等同志 相謀促求民政移讓之計 直觸於革命政權 付之革裁 竟爲囹圄之身抑夫公之所擧非私利私慾 且非貪欲政權 意在愛國 豈不痛哉 然先德 事必歸正之言 不誣也以遂受獄苦三年 豈不歎哉 公在家孝悌敬義 敦睦諸族 在外爲國之誠 過人非凡 如是公地之懿行美德 想必有來矣哉 一則天賦所露一則承襲累世家道薰陶耳 公之一言一行 莫不爲人之儀範 誰不感歎 配扶餘徐氏 南善之女 有二男 長曰 栒翼 次曰昇翼 竊冀公之後賢 承襲懿行美德 永傳後世 勉哉勉哉 豫備役 陸軍少將 朴炫洙 謹撰 前國會副議長 鄭成太 謹撰 의송공휘상훈행장(義松公諱尚勳行狀) 조공(趙公) 상훈(尚勳)의 자(字)는 성범(晟範). 호는 의송(義松)이며 관향은 옥천(玉川)이시다. 그 비조(鼻祖)는 고려 문하시중 휘 원길(元吉)이요. 그 후 조선 병자호란 때 공신(功臣) 휘 엄(儼)은 공의 十二대조이며 휘 성순(成淳)과 사복시정에 추증된 휘 자옥(自玉), 승지(承旨)에 추증된 휘 영흥(榮興), 홍문관 제학에 추증된 상록(相祿), 도정(都正)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제수한 동혁(東爀)이 공의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이다. 공의 가문은 실로 혁혁한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하겠다. 공은 개해년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하는 마음이 지극하였으며 종족간에 돈목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범한 재기(才器)와 늠름한 풍채는 보는 사람마다 장자(長者)의 기상이라고 칭찬하였다. 공부할 나이가 되자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유학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을유년 광복(光復)을 맞아 기뻐 날뛰며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막 해방이 된 후여서 국내 정세가 불안하고 좌익분자(左翼分子)들이 난동을 부렸으며 국토가 양분되는 등 나라의 형세가 계란을 포개놓은 듯 위태로웠다. 공은 결연히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무자년(一九四八) 十月 육사 특별 七기생으로 졸업, 육군소위(陸軍少尉)로 임관하였다. 육이오 전쟁 당시에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으니 그 무훈(武勳)은 역사책에 기록한 만하다. 여러 차례 진급하여 육군중령(陸軍中領)으로 기해년(己亥年:一九五九)에 퇴역하였는데 몸은 비록 군에서 떠났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활동한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경자년 군사혁명(軍事革命)이 일어나 공산침략방지, 부정부패일소, 국토통일완수, 자유민주주의 정치확립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을 보고 공은 심사숙고한 나머지 이에 적극 협조하였으나 시일이 지나자 혁명 정권은 공약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정연장을 획책하는 기미가 엿보였다. 이에 공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바치고 살신성인(殺身成人)의 충정(衷情)에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 못하고 전 육군대령 김동복(金東馥)등 동지들과 모의하여 혁명공약 이행과 조속한 민정이양(民政移讓)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되니,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 등의 거사(擧事)가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한 것이 아니요. 또 정권을 탐내서 한 것이 아닌 나라를 위하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었는데도 三年의 옥고(獄苦)를 치루었으니 한탄스럽다고 하겠다. 공은 집안에서 효경(孝敬)을 실천하고 친척들과는 돈목(敦睦) 위주로 하였으며 밖에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정신이 투철하였다. 공의 이러한 정신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선대의 가훈(家訓)을 잘 이어받아서 일 것이다. 공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한 가지는 모두 당시에 모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으셨으니 어찌 감복(感服)하지 않으랴. 배위는 달성서씨(達城徐氏) 남선(南善)의 따님으로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은 순익(栒翼)이요, 차남은 승익(昇翼)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후손들은 선조의 아름다운 덕행(德行)을 이어받아 후세에 영원히 전해야 할 것이다. 壬戌年 八月 十日 豫備役陸軍少將 朴炫洙 前國會副議長 鄭成太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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